와이나이 사다유키는 1874년, 게마나이 학교의 대용교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881년에 공부성(과거 일본의 사회기반 정비와 산업 진흥을 담당하던 중앙 정부기관)이 운영하던 고사카 광산에서 광부를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도와다 호반의 은광인 도와다 광산에 배속된 후, 그는 어류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84년 이후 와이나이는 잉어의 치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어류들을 도와다코 호수에 방류하였고, 1897 년에는 어류 양식에 전념하기 위해 광산을 그만두었습니다. 체리송어와 닛코 송어를 시험해 보던 중, 와이나이는 드디어 각시송어로 성공하게 됩니다. 1902년에 아오모리현 수산시험장의 소개로 홋카이도의 시코쓰코 호수로부터 각시송어의 알을 구입하여 부화시킨 후, 다음해인 1903년에 방류했던 치어가 1905년에 성어가 되어 산란을 위해 도와다 호수로 돌아온 것입니다.이 공적을 인정받아, 와이나이는 1907년에 녹수포장(사회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녹색 리본의 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양식 어업에 종사하면서, 와이나이는 도와다 호수의 관광지 개발에도 힘썼습니다. 1897년에 료칸 “간코로”, 1916년에는 “와이나이 도와다 호텔”을 오픈하였습니다. 도와다코 호수를 열심히 선전하여, 자신의 호텔에 일본 황족이 머물게 하는 것을 실현하고, 내무성에는 도와다코 호수와 그 주변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도록 진정하기도 했습니다. 와이나이는 1922년에 65세에 게마나이무라 (현재의 가즈노 시 게마나이)에 있는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대용교원 시절의 와이나이
1884년 당시의
도와다 광산 노동자